진주만 공습 선전포고 조차 없었던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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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개시되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 , 일본 제국은 선전포고 조차 하지 않은채 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게 됩니다. 이는 국제 외교사에 보기 드문 사례로 당시 중립이었던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죠.

 

 

 

 

 

 

전쟁의 시작 진주만 공습 

 

1941년 12월 7일. 75년 전 미국 하와이 준주 오아후 섬 진주만 에서는 세계 전쟁사에 기억 될 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일본제국의 미국 태평양 함대 공격인데요. 이를 진주만 공습, 하와이 해전 이라고 부릅니다만 제 생각에는 진주만 기습 이라고 하는편이 나은것 같습니다.

 

▲일본제국의 욱일기

 

 

 

 

그 당시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 입장을 고수했던 미국을 일본이 기습한 이유는 선제권을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미국이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석유를 얻지 못하게 제재를 하자, 어차피 붙게될거 기습을 해서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괴멸 직전 상태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미군의 피해가 컷던 이유는 바로 일본의 선전포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는 선전포고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격을 한다고 미리 말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대비를 못한 미국 함대는 크나큰 피해를 입게되죠. 그 뿐만 아니라 미군의 방심또한 큰 피해를 낳았습니다. 

 

 

 

 

 

진주만 상공으로 날아든 일본의 비행기를 보고서도 비행연습이라 착각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내 이 비행기들은 미군의 함대, 전함, 여러 시설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하죠...

▲일본 카미카제 특공 비행기 사쿠라바나와 일본군

 

 

 

 

 

일본의 카미카제 자폭특공대

 

 

이때 일본에서 큰 역할은 한 것이 바로 카미카제 자폭 비행 부대 였습니다. 카미카제는 일본의 자폭특공대로써, 작은 비행기에 폭약을 한가득 싣고, 적군의 여러 군사시설과 비행기,함대, 시설, 전함, 탱크 등의 시설로 돌진해 자폭을 하는 부대였는데요. 시작 당시에는 일본 비행 전문가들이 동원되었지만, 지원 인력이 부족해 지자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대거 투입시켜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로 입대시키게 됩니다.

 

▲당시 미군의 상황(상상도)

 

 

▲격추되는 카미카제 비행기

 

 

 

 

진주만 공격을 주도 했던 사람은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입니다.  석유 수출을 막는 등 자원적으로 일본을 계속 압박한 미국에 대해서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결단했고, 나중에 골칫거리가 될 미국을 먼저 공격해서 남방작전에서 우위를 선점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카미카제의 공격을 받은 미군전함(갑판이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준비

 

 

일본 수뇌부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에 대해서 크게 논란이 있었지만 워낙 완고한 주장과 연합함대를 사퇴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수락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남방작전과 동시에 미국의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죠.

▲카미카제 공습으로 심하게 파손된 미군의 항공모함

 

 

 

일본은 진주만 공습 전 영국군을 사례로 연구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타란토 공습 인데요. 이 모델을 표방으로 연구를 내린 결정은 진주만과 타란토의 입지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항공기 400대와 숙련된 조정사만 있으면 진주만 공습이 성공할거란 결론을 냈기 때문에 작전 실행을 결정하게 됩니다.

 

 

 

여름철 부터 철갑탄으로 폭격 훈련과 뇌격훈련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주만의 지형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조종사들에게 지형을 익히도록 하는 동시에 전함과 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도록 훈련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 제국은 태평양 함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 하게 됩니다. 항공기지의 위치와 군함의 정박 위치, 그리고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을 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 시간까지 정하게 되죠. 바로 일요일 새벽인데요. 모든 군함이 입항 한 이후에 미군들이 휴식을 취할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본군은 공격 일정을 12월7일로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작전일이 확정 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일본의 제1 항공함대를 주축으로 기동부대를 조직하여 11월 26일 진주만을 향하여 출발하기 시작합니다. 치밀하게 한척씩 한척씩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일본군은 치밀하게 항로를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민간상선이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을 위주로 선정하여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히도카푸 만에 집결한 일본제국 병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준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잠수함3척, 급유함 8척등 총 31척이었습니다. 11월 22일 일본 제국의 나구모 사령관은 전 기동부대 병력들에게 공격 목표는 진주만이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이 만큼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치밀하게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각 항공모함당 비행기 탑재 현황은 1항공전함 아카기, 카가에 각 60대, 2항공전함 소류,히류에 각 50대, 5항공전함 쇼카쿠와 즈이카쿠에 각 70대씩으로 총 360대에 달하는 비행기를 싣고 있었으며, 모든 항공기가 일제히 이륙할 수 없기 때문에 1파,2파로 나뉘어서 발진을 했습니다.

 

 

 

 

첫 발진은 일출 30분전!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 일본군은 첫 공격을 시작합니다.

 

▲일본제국의 공격을 받고 망연자실 하고 있는 미국군

 

 

 

▲ 폭격을 받고 반토막난 미군 군함

 

▲일본제국 카제카게 자폭특공대

 

▲바다로 추락하는 일본 제국 비행기

 

 

 

▲치열했던 진주만 공습

 

 

진주만 공습 시 두 나라의 전력과 피해상황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12월7일 오전6시, 일본군의 비행조종사 들은 머리에 흰색 '하치마키'를 동여매고 출격하기 시작합니다. 15분만에 1파 183대가 출격. 공격대형을 갖춘 후 오아후 섬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7시49분 일본군의 비행기는 진주만에 도착했습니다. 

 

훈련으로만 알았던 미군은 크나큰 피해를 입게되죠. 여기서 '진주만 공습, 이건 훈련이 아니다" 라는 방송을 내 보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문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진주만 기습에 크게 성공한 일본과 그 소식을 들은 독일의 히틀러는 기뻐했지만, 그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일본에게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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